응급의학 1호 교수, 응급의학과 첫 개설, 학회 창립 주역

대한민국 응급의학 발전에 큰 업적 남겨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응급의학과 첫 개설

서울 아시안게임 폐막식이 열리는 날인 1986년 10월 5일, 대한민국은 중국 다음으로 아시아 스포츠 강국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아시안게임 개최국으로서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아시안게임은 2년 뒤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한 시험 무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서울 아시안게임은 27개 국가에서 대규모의 선수와 임원진들이 몰려 그때까지 역대 아시안게임 사상 최대 규모였다.

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던 건 주최 측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대회를 잘 치를 수 있도록 보이지 않은 곳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의료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계기로 응급 상황 발생에 대비한 별도의 의료 조직을 고민한다. 응급상황을 신속하게 대처할 의료가 필요했다. 두 스포츠 축제는 응급의료에 관한 의료계 및 정부의 관심을 싹트게 만들었다.

아시안게임 같은 대규모 경기에서 응급의료를 담당할 의사가 없으면 곤란하다. 당시 아시안게임 때 미국에 있었던 한상인 선생이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며 무사히 대회를 치러냈다. 그는 외과 의사였다. 아시안게임 경험을 바탕으로 2년 뒤 열리는 올림픽에도 한상인의 역할이 기대됐다.

그러나 아시안게임이 끝나자마자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로 인해 2년 뒤 서울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응급의료를 맡을 의사가 없어 의료공백이 우려됐다.

잠실 경기장과 가까운 병원인 강남 세브란스병원은 아시안게임에 이어 올림픽에서도 ‘主 후송병원’으로 지정됐다. 그렇지만 고민이 있었다. 참가 선수와 임원의 건강을 책임지는 후송병원의 역할은 맡았지만, 마땅한 의료수장이 없었다. 병원은 어떻게 주 후송병원 역할을 할지 암담했다.

당시 병원들의 응급의료 상황은 열악했다. 환자를 실어나르는 수단은 운송기능만 있는 단순 구급차가 전부였다. 구급차에는 의료조치를 할 수 있는 시설은커녕 약도 구비되어있지 않았다. 단지 환자만 이송할 뿐이었다.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실어나르는 것이 전부였다.

올림픽 주 후송병원인 강남 세브란스병원은 응급의료를 담당할 의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응급의학 전문의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응급의학과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급의학과와 가장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과를 찾았다. 응급수술을 하고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는 진료과는 외과밖에 없었다. 외과 의사를 채용해 서울올림픽대회에 파견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1987년 3월, 강남 세브란스병원은 국내 최초로 응급의학과를 개설하고 초대과장으로 이한식 선생을 영입한다. 그는 인천기독병원에서 1년을 근무한 뒤 개인병원을 차려 3년 동안 개업의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개업의가 의과대학 교수가 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세브란스병원 외과 전문의를 거쳤던 이한식은 응급의료를 맡을 적임자로 인정받았다. 이렇게 그해 이한식은 강남 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초대과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의 응급의학과 의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이한식은 1988년 4월부터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의무부장으로 파견을 나갔다. 매일 올림픽 경기장에서 지원업무를 보며 응급환자 발생에 대비했다. 당시 의료지원팀은 의무부장인 이한식을 비롯해 외과, 정형외과, 피부과 등 몇 과에서 파견된 의사와 간호사 10여 명으로 꾸려졌다.

1988년 9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메인스타디움인 잠실 주경기장은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세계 유명인은 물론 체육 인사들이 대거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한식은 그렇게 큰 국제대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긴장이 많이 됐다. 혹시나 큰 사고가 터지면 어떡하나……?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외과에서 무수하게 경험했던 환자 처치와 수술로 이미 단련된 몸이었다. 어떤 사고도 거뜬히 해낼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림픽 대회 기간 중 환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마라톤 때 아프리카에서 온 선수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져 후송한 것과 올림픽 위원회 임원 가족 중 한 사람이 맹장염으로 긴급 수술을 위해 옮긴 것 외에는 별 사고 없이 마무리됐다. 많은 경험을 쌓는 것도 좋지만 대회 때 환자가 오히려 없는 것이 훨씬 다행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응급의료를 시작했던 제1호 의사 이한식.

그는 이렇게 대한민국 응급의료의 시작을 알렸다.

 

대한응급의학회 창립 주도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 응급실은 그 존재가치를 급격히 잃어갔다. 응급실은 인턴이 근무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퍼져있어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인턴이 근무하는 곳에 과장이 무슨 필요가 있어?”

응급의학과가 별 필요가 없다는 자조섞인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이한식으로서는 주위의 시각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경을 쓴다고 해결될 일인가?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응급의학과를 없애지 않고 계속 두기로 했다. 병원도 시대적 흐름을 거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시기 이한식은 응급실의 위상을 높이겠다고 마음먹었다. 응급의학의 불씨를 살리고 싶었다. 1989년 초까지 강남 세브란스병원 원장실 옆 회의실에 대학병원 응급실장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우리도 학회 하나 만듭시다!”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이한식도 외과 의사, 다른 응급실장들도 거의 외과 의사가 맡고 있어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응급실의 어려움을 동병상련으로 느끼며 서로가 하나의 목표, 응급의학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뜻을 모았다.

몇 차례 소위원회를 열어 학회의 기본 회칙 틀을 잡았다. 구체적으로 학회 모임의 밑그림을 조금씩 그려나갔다. 장석준(강남 세브란스병원)과 김승호(신촌 세브란스병원)가 강남과 신촌에서 각각 실무를 맡았다.

마침내 1989년 7월, 서울 르네상스 호텔에서 전국 18개 대학병원에서 26명이 창립 멤버로 참여한 첫 모임을 열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대기의 열기도 응급의학을 전문과목으로 만들려는 열정보다는 덜했다.

뜨거운 열기를 이어가며 그해 12월 1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대한응급의학회 창립총회를 열고 황의호 연세대 의대 교수를 초대회장으로 선출한다. 지훈상 강남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장, 임경수 원주 세브란스병원 교수, 고영관 경희대병원 교수, 이양근 전북대병원 내과 교수, 강성준 원주 세브란스병원 교수 등이 이한식과 함께 학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당시 실무를 담당하며 응급의학과 성장의 마중물 역할을 했던 장석준·김승호 선생은 안타깝게도 몇 년 전 유명을 달리해 지금은 고인이 되고 말았다.

 

최초 전공의 수련 과정 개설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이한식은 프랑스 응급의료체계를 둘러보고 응급의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공의 수련 과정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공의 수련 과정 개설은 이한식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이한식은 ‘형제병원’인 신촌 세브란스병원과 수련 과정 개설을 논의했다. 그러나 신촌의 반응은 싸늘하게 돌아왔다.

“응급의학이 언제 전문과목으로 될지 모릅니다. 전문의를 뽑지 말고 다른 과에서 전문의를 데려와 응급의학 관련 세부 전문의로 만듭시다.”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응급의학이 의료의 한 축으로 제대로 구축하기는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한식은 이대로 멈춰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전공의 과정을 직접 만들어 난관을 돌파할 작정이었다.

“무조건 레지던트를 만들어야 합니다. 보건사회부에서도 응급의학 전문의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응급의학을 전공의로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 응급의학을 전공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한식은 수련 과정을 만들고 싶었다. 그대로 밀어붙였다. 전공의 수련 과정 공고를 내고 수련의를 모집한 결과 연세대 의대 출신 장석준이 지원했다.

이한식은 장석준에게 물었다.

“장 선생.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오는 걸 후회하지 않겠나?”

“네! 선생님. 한번 하고 싶습니다.”

1989년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전공의 수련 과정을 처음으로 만든 뒤 1호로 뽑힌 레지던트가 장석준이었다.

그러나 당시 다른 과에서는 신생과인 응급의학과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전문의 인정은 물론 과가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장석준은 응급의학과의 길을 기약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한편으론 모험으로, 다른 한편으로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무수히 들었을 것이다. 1989년 트레이닝을 시작해 1993년 2월 수련 과정을 마칠 때까지 응급의학이 전문과목으로 인정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응급의학과 레지던트가 됐지만 언제 전문의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었다.

장석준은 수련 과정을 마친 뒤 전문의 자격증 없이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펠로우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1년, 2년이 다 가도록 응급의학이 전문과목으로 인정받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던 중 1996년 마침내 첫 전문의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장석준은 시험에 통과해 3년 만에 다시 강남 세브란스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응급의학과 교수로 있는 이한식이나 막 전문의를 딴 장석준 등에게 응급의학의 발전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응급의학이 생소한 데다 제대로 교육커리큘럼도 없어 전부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응급의학에 대해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미국에서 나온 일부 원서(原書)가 전부였다.

 

응급의학 전문의 시험 시행

응급의학은 그 나라의 경제 수준과 관련돼 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수준이 올라와야만 환자들도 응급의료의 필요성을 느낀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동차의 폭발적인 증가와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응급의료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급속도로 무르익어갔다.

그 상황에서 1989년 도시 지역 자영업자를 비롯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되면서 응급의료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의료비가 싸졌고, 응급실에는 일반 환자들로 넘쳐났다.

1977년 의료보험이 실시된 이후 생활보호대상자와 500명 이상의 사업장 근로자들에게만 적용됐다. 혜택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후 1989년 의료보험 적용의 확대로 누구든지 병원 문턱을 쉽게 밟을 수 있게 되면서 응급실에 환자가 크게 늘어났다.

의료보험이 확대되면서 환자들은 ‘같은 값이면 큰 병원으로 가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응급실은 더 혼잡해졌고, 의료진은 밀려드는 환자를 다 감당하기에 힘에 부쳤다. 응급실 앞 양옆 복도에는 환자들이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무작정 진료를 기다려 응급실은 항상 도떼기시장처럼 북적거렸다.

환자와 의료진 간의 충돌도 자주 빚어졌다. 명절 때만 되면 모든 환자가 응급실로 몰려 의료진은 넘쳐나는 환자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명절이 끝나면 언론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문제점을 집어냈다. 인력보강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였다. 환자가 많아져 응급실 근무 인력을 크게 늘려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각종 대형 사고가 잇따르면서 응급의학의 중요성이 더 커졌고 전문의가 많이 필요한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때 이한식은 1995년 신촌과 강남세브란스병원에 응급의학 교실을 만들어 시대적 흐름에 발을 맞췄다.

<연세대 의과대학 응급의학교실의 심볼마크>
독수리는 연세대의 심볼이며, 심실세동 심전도를 빨간색으로 표현해 응급의학을 상징하고 있다. 198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자부심을 ‘the First’로 표현했고, 최고의 응급의학과로 도약하고자 하는 의지를 ‘the Best’라는 슬로건으로 담았다.

1996년 1월 첫 응급의학 전문의 시험이 치러졌다.

출제위원은 이한식과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부회장 2명, 그리고 대한의학협회에서 파견한 신경외과, 내과 전문의 등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응급의학과 관련한 문제집과 서적이 없어 어떤 유형으로 시험출제를 만들지 출제위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은 외국 응급의학 전문의 시험 문제지를 풀기도 하고 미국의 서적을 번역해 문제수보다 20배나 많은 문제를 문제은행에 집어넣었다.

이한식은 응급의학과 관련 제도와 경험이 없는 황무지에서 제도를 정비하고 학문적 위상을 정립해냈다. 응급의학이 전문과목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응급의학 전문의를 빨리 늘리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초창기 전문의 시험에 많은 사람이 응시하는 길밖에 없었다. 응급실장으로 1년 이상 근무한 사람 모두에게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느슨한 자격조건은 전문의 트레이닝을 받은 사람보다 경력직이 더 많이 몰리게 하는 요인이 됐다. 1996년 제1기 전문의 시험 합격자 51명 중 응급의학 전문의 트레이닝을 받은 사람은 20명도 채 되지 않았고 30명 이상이 경력자였다.

출제위원을 맡다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이한식 등 1기 전문의 시험 출제위원들은 1년 뒤 제2회 전문의 시험에 경력직으로 응시해 모두 합격했다.

이후 3회 전문의 시험부터는 응급의학 전문의 시험에 많이 응시했지만, 응급의학을 전문으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조리 떨어졌다. 점점 합격 인원이 줄어들면서 응급의학 전문의 시험도 제대로 수련을 받지 않으면 거의 합격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70~80년대 응급실, 의료비 비싸 환자 거의 없어

이한식이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인 1975년에는 전문과목을 미리 정해놓고 인턴을 시작했다.

응급실 수준은 열악했고 중환자가 아닌 이상 환자들도 응급실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응급실에는 ‘급행료’를 주지 않으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의료비도 비싸 일반 환자들은 이곳에 오기가 어려웠다. 중환자를 위한 의료장비를 별도로 가동해야 하니까 의료비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대학병원 응급실은 죽을 정도로 응급한 사람 아니면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응급실에는 환자가 많지 않아 인턴 2명이 교대로 근무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인턴들이 의과대학을 막 졸업하고 투입한 초짜 의사로서 환자 보는 경험도 적어 환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모를 때도 있었다. 이론으로는 배웠지만, 인턴을 막 시작했을 때는 죽음 확인조차도 쉽지 않았다. 한참 배우고 나서야 알았다. 심전도 검사 이후 사망 여부를 알 수 있었지만, 환자들은 이 검사를 많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시절이었다.

응급실 시설도 100평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이한식이 근무했던 강남 세브란스병원은 경제 수준이 비교적 높은 강남에 있어 그나마 응급실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밤새 수십 명의 환자가 몰리면 의료진의 감당이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급하게 병실을 늘렸다. 일반병실이면 15자리 병상을 만들 수 있었지만, 응급실에는 38병상까지 늘릴 수 있었다. 일반 환자를 수용할 병실에서는 벽으로 둘러쳐져 있어 병실이 구분되어 있었지만, 응급실에는 벽이 없어 많은 병실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환자는 계속 늘어났고 병상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대로 바닥에 누워 마냥 진료를 기다렸다. 그 상황이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2002년 도로교통 범칙금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응급의료기금으로 투입하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일부 개정됐다. 외상환자 대부분이 교통사고로 발생하기 때문에 도로교통 범칙금을 환자치료를 위한 기금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2003년 응급의료기금이 400억 원으로 확충됐다. 이전보다 20배 이상 뛴, 획기적인 변화였다.

정부는 국가 지원을 해주는 만큼 응급실의 책임을 명확히 물었다. 응급의료기관을 지원해주면서 응급실을 엄격히 관리한 것이다. 전체 환자 체류 시간 등을 따져 지원 여부를 결정했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응급실은 지원금을 주지 않았다. 이후 응급실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응급실은 보통 1,000평 가까이 되고 응급 병동이 따로 만들어져 응급환경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응급의료 변천 과정

응급의료 초창기인 1987~88년에는 응급실을 방문하는 환자가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한식은 마네킹을 들고 전국으로 다니면서 CPR(심폐소생술) 교육의 필요성을 알릴 수 있었다. 그는 응급실 직원과 일반인에게 CPR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교육했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수상안전(인명구조요원) 교육을 위해 CPR을 하고 있었지만, 병원에서는 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맞는 표준화된 심폐소생술 지침이 없었고 의료인조차도 명확한 지침을 몰라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한식은 심폐소생술 표준화가 시급하다고 보고 1991년 강남 세브란스병원에서 국내 최초로 CPR 표준화 작업을 한다. 이후 심폐소생술의 공동지침과 교육 및 보급을 관장하는 통합 기구인 대한심폐소생술협회를 만들어냈다.

예전에는 생명이 위급한 환자들은 다른 과에서 입원환자로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병실까지 못 올라간 환자들은 밤새 응급의학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스스로 호흡할 수 없는 위급한 환자들은 더욱 그런 상황이 반복됐다.

그 과정에서 응급의학과에서 실시하는 CPR의 효과가 서서히 환자들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응급의학과에서 하는 CPR은 다른 과에서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늘어나고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생 병원 응급의학과를 중심으로 응급환자들의 치료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병원이 아주대병원과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응급의학과였다. 이들 병원 응급의학과가 점점 알려지면서 응급실을 통해 환자를 모으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지방에서도 응급의학과 역할이 차츰 커졌다.

1990년대 중반은 각종 대형사고로 대한민국 전체가 어수선했다.

대형사고가 많아지면서 역설적으로 응급의료가 진면목을 발휘하는 시기였다. 응급의학이 생기면서 응급환자를 제대로 치료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93년 7월 26일 전남 해남군 화원면 운거산 인근 232m 지점에 아시아나항공 항공기가 추락했다. 이 사고로 승무원과 탑승객 66명이 사망하고 44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고 소식은 산 아래 주민의 신고로 알려졌고 군 병력까지 동원해 대대적으로 구조가 시작되었지만, 항공기가 산에 추락해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고가 발생하자 TV 방송은 신속하게 현장에 출동했다. 그러나 부상자들이 응급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짐짝처럼 헬기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는 것이 고스란히 국민에게 생중계됐다. 사고현장에 도착한 군용헬기는 산소마스크 등 기본적인 응급진료 장비도 갖추지 않았으며 구조장비는 구명밧줄밖에 없었다. 환자를 고정한 상태에서 들어올려야 하는데 장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 환자를 수송한 게 나중에 화근이 됐다.

당시 잘못된 구조방식을 국민은 인식하지 못했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때부터 환자 이송할 때 고정하는 게 중요한 처치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응급의학과의 역할이 서서히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그동안 응급환자를 잘못 옮겼다는 것을 의사들이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환자 가족들에게 문젯거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고정하지 않은 채 환자를 이송해 사지가 마비되니까 환자 가족이 소송을 제기했다. 오히려 병원에서 응급의학과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서울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려 출근하거나 등교를 위해 차량에 타고 있던 시민 49명이 한강으로 추락해 32명이 숨졌다. 이때는 응급구조 개념이 도입될 시기였다. 당시에는 구급차가 지나가도 차량이 비켜주지 않았다. 출근 시간에 구급차, 소방차가 출동해도 현장에 접근도 못 하고 돌아가야 했다.

이 때문에 현장 정리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되면서 서서히 응급의학뿐만 아니라 대형사고가 터지면 어떻게 현장 정리를 해야 하는지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1996년 6월 29일 오후 5시 52분경 서울시 서초동 소재 삼풍백화점이 무너져내렸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501명이 숨지고, 다친 사람은 939명, 6명이 실종됐다. 삼풍백화점과 가장 가까운 강남성모병원에 중환자가 집중되면서 큰 혼란이 벌어졌다. 당시에는 환자 분산 개념이 없었을 때였다.

중환자는 강남성모병원으로 가고 가벼운 환자는 다른 병원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한식이 근무하던 강남 세브란스병원에도 경환자 100여 명 넘게 왔다. 그때부터 대량구호의 중요성이 생겨났다.

이한식을 비롯한 응급의학 전문의들은 삼풍사고를 겪으면서 대량구호 개념을 잡고 준비에 들어갔다. 마침 아주대에서 훈련하던 중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이 터졌다. 대량구호 훈련을 하면서 제대로 된 분류를 통해 응급의료가 빛을 발하게 됐다.

이한식 교수는 외과에서 응급의학으로 전환을 잘했다고 말했다.

“만약 제가 계속 외과에 있었으면 대형사고가 났을 것입니다. 외과에 있으면 수술을 잘했니, 못했니 하면서 시비를 건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겁니다. 응급의학으로 전환한 것이 저에게는 덕 보는 일이었죠. 비록 제 의지와 달랐지만….”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학회 활동을 별로 안 하고 싶다고 했다.

5년 전 정년퇴임을 하고 이제 고희(古稀)의 나이가 됐다.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손주들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그리고 ‘휴, 깜짝이야! 벌써 인생 고래희?’라는 상태 메시지가 적혀 있다.

 

이한식 교수 프로필

△1950년 출생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연세대 의과대학 석·박사 △일반외과·응급의학과 전문의 △인천기독병원 일반외과 과장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 △강남 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강남 세브란스병원 응급진료센터 소장 △대한외상학회 감사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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